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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예 - 신의 한수, 워킹홀리데이

조보예 성도의 간증문을 함께 공유합니다. 보예에게 있어서, 저희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고향과 같은 공간입니다. 이 곳에서 회복되고, 주 안에서 새로운 비전을 발견한 보예의 삶을 축복하며, 제2의 보예가 될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영국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한 이유? 영어가 웬수라..> 브렉시트, 영국 취업,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상황도 지나니 2016년 영국에 첫 발을 디딘 날이 먼 옛날 같이 느껴진다. 당시 나는 엔지니어로 취직한 지 7년차였고 많은 또래 직장인들이 헬조선이니 탈조선이니 하며 한국에서의 삶을 고단하게 느끼는 시기였다. 법정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제한되기 이전이었기에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반복되는 야근에 슬럼프까지 겹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기업이나 외국계를 가면 사정이 나을까? 이직을 하고 싶었지만 영어 무능력자인지라 쉽사리 지원할 맘이 들지도 않았다. 내 영어실력에 대해 말하자면, 중학교 2학년 때 `HAVE + P.P`를 배울즈음 영어를 포기했다. 언어에는 소질 없는 이과형 뇌구조를 갖고 태어나, 문장 구조니 시제니 하는 것들이 이해되지가 않았다. 회사원이 되어서는 자기계발을 위해 전화영어도 하고 주말엔 영어학원, 영어과외를 다니며 수업도 받아봤지만, 간단히 자기소개하고 행인들 길 알려주는 수준에서 머물 뿐 초급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다가는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해도 안 될 것 같았다. 마침 친하게 지내던 교회 동생이 영국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국이 유럽국가 중 하나라는 기본 상식도 없던 내가 그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영국은 영어의 본고장이고 다른 워킹홀리데이와는 다르게 2년동안 체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 친구가 한국에 휴가차 방문했을 때 같이 저녁을 먹는데, 계속 영국 워킹홀리데이에 지원하라고 하는 것이다. ‘난 이미 한국 나이로 서른인데, 워홀은 대학생들 같이 어린 친구들이나 가는 거 아닌가?’ 시큰둥한 내 반응을 보고 그 친구가 말했다. "언니, 나이 제한은 만 서른 살이고 막차 타고 오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날의 식사 이후 내 마음이 붕 뜨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야근과 선임들의 진급누락을 보며 회사생활에 대한 회의감에 점점 지쳐가고 있던 중이었고, ‘영국 워킹홀리데이’라는 글자가 아른거렸다. ‘영국에 가면 영어실력도 늘고 새로운 경험도 하면서 휴식도 취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머릿속 긍정회로가 쉬지 않고 돌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기회가 내 인생에는 없을 것이고 나중엔 늙어서 그 때 영국에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지원한 영국 워킹홀리데이, 며칠 뒤 발표된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을 발견하고 바로 부장님께 갔다. "부장님 커피 한잔 하시지요." 집에 가서 고민하고 결정하면 마음이 변할 것 같아서 바로 뱉어버렸다. 이젠 되돌릴 수 없다! <ENTP의 뜬구름 잡는 계획, 리스크 앞에서 도전할 수 있는 이유> 워킹홀리데이 도전은 사실 무모한 일이었다. 한국의 취업난 상황에서 여자 나이 서른, 대한민국 1000대 기업 대리에 나쁘지 않은 연봉, 이런 일자리를 버리고 워킹홀리데이를 간다? 더 큰 걱정은 워킹홀리데이가 끝난 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취업 문제였다. 실제로 회사에서도 나의 퇴사를 막기 위해 이런 현실적인 부분들을 언급하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설득했다. 그때 다시 나의 긍정회로가 타올랐다. ‘일본’이라는 대안이 떠올랐다. 한국에 돌아와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면 일본으로 취업을 하는 것이다. 대학교 때, 일본 해외 취업 연수과정을 이수해서 일본어가 어느 정도 가능했고, 당시 일본 구인난이 심한 상황이어서 일본 취업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에 사표를 낸 후 영국에서의 삶을 계획했다. 많은 블로거들이 남긴 후기들을 보면서 출국 전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지만, 영국에서의 삶은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영국 취업사이트에 내 전공의 엔지니어 직업을 검색해봤다. 시급 20파운드 정도를 받았다. 당시 환율이 1파운드에 1800원 정도니까, 어림잡아 시간당 3만5천원이었는데, 주 40시간씩 일한다고 가정했을 때 연봉 칠천만원 이상이 나왔다. 세금으로 반을 낸다고 해도 월 삼백만원 정도는 통장에 찍힌다는 말이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설레기까지 했다. 영국에서 최선을 다해서 엔지니어가 되자, 아니면 접시닦이 알바라도 하는 거지 뭐, 모 아니면 도다, 그리고 나는 아직 젊다. <상상과 먼 현실, 한인 슈퍼 캐셔가 되다> 영국행 비행기에서 느낀 설렘과 두려움, 낭만적인 연애를 하고, 엔지니어가 되어 멋진 차도 끌고 다니는 커리어우먼이 될 나의 모습을 그리며 도착한 영국은 시작부터 너무나도 쓴맛을 보여주었다. 영어 습득을 위해 ‘한국사람은 피하고 최대한 영국사람들과 지내야지’했던 호기는 먹고 자고 하는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언어라는 장벽 앞에서 이력서는 무시당하기 일쑤, 엔지니어는커녕 한국인들은 프리패스라고 하는 스타벅스 수습직원조차 채용에서 탈락했다. 막막한 상황에서 결국 한국 커뮤니티 사이트인 ‘04UK’를 통해 한인 쉐어하우스를 구하고 한인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 경험도 없이 자라온 내게 식당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돌솥비빔밤, 부대찌개 같은 뚝배기 음식들은 서빙하기엔 너무나도 무거웠고, 영어를 모르니 손님들이 육회 (raw beef) 비빔밥을 주문하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소고기(beef) 비빔밥으로 주문 받아 사장님께 된통 혼나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한인 식당 일은 포기했다. 한국에 돌아갈까? 절망감이 마음 속에 가득 차 출렁거렸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한인교회에서 알게 된 언니의 소개로 H-마트라는 한인슈퍼에서 일을 시작 할 수 있었다. 스타벅스 3번, 로컬 카페, 스시 집, 한인식당 등 짧은 시간에 많은 실패를 경험한 후 구한 일이라 감사했지만, 한국에서 엔지니어였던 내 모습에 비해 영국에서 아르바이트생이 된 내 모습을 보자니 내심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배운 영어라고는 "would like a bag?" 아니면 "pay by card or cash?" 뿐이었고 그 외에 손님들이 물건을 찾거나 제품에 대해 질문을 하면 다른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부정적인 생각만 할 수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런던 한인 슈퍼에서 일하는 것도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아시아나 유럽에서 온 유학생들이어서 영어로 대화할 기회가 많았고, 떡볶이나 닭강정 같은 Daily foods가 남으면 집에 가져가서 하우스메이트들과 나눠먹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EPL에서 활동하던 이청용 선수나 기성용 선수가 장을 보러 오면 같이 찍은 사진을 한국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한테 자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며 어느새 영국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엔지니어 잡 구하기 프로젝트> 영국에 적응했지만 언제까지고 아르바이트생으로 머물 수는 없다고 느껴 한인 슈퍼 일을 하면서 엔지니어 일 구하기 계획을 짰다. 계획은 심플했다. 이력서 준비 3달, 면접 준비 3달, 나는 곧바로 현지 영어튜터와 함께 이력서를 준비했다. 정해진 이력서 형식이 없어서인지, 이력서 작성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수정의 수정을 거쳐 완성된 이력서를 취업사이트에 올렸다. 연락이 오기까지 최소 1개월은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르게 2-3일 만에 헤드헌터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또다시 영어실력이 내 발목을 잡았다. 상대방은 내 이름도 알고, 학교 이름, 전 직장도 들리는 것 같고 엔지니어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눈치상 이력서 보고 전화한 것 같았다. 뭐라고 하는지 모르니까 “I don't understand. yes, yes, no, no.” 하다 보니까 저쪽에서 “Thank you, bye bye.” 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 이후로도 2-3일에 한번 꼴로 그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전화 공포증에 걸리게 되었다. 모르는 번호가 뜨면, 무서워서 받지 않게 된 것이다. 급작스런 헤드헌터의 전화로부터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영국에서는 전화를 안 받으면 음성메세지를 남긴다. 그 음성메세지를 튜터랑 함께 듣고 예상되는 질문들에 답하는 연습을 했다. 이삼주가 지나니 연락이 뜸하게 온다. 아마 엔지니어를 구하는 모든 회사들이 다 한번씩 나에게 전화하고 더 이상 남은 회사가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가끔씩 연락이 왔는데 답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기억해내 튜터랑 같이 또 상황 연습을 했다. 천천히 조금씩 나는 전화로 비즈니스 영어를 구사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영국 워킹홀리데이 포기 후 반전, 워킹홀리데이 후반전이 된 재규어 랜드로버> 2017년 여름, 워홀 온지 1년이 지났지만 내 영어 수준은 여전히 한인슈퍼에서 봉투필요하냐, 카드로 계산할거냐, 묻고 식당에서 음식 주문하는 정도가 다였다. 런던의 살인적인 물가에다가, 어학원에 튜터비까지 쓰면서 한국에서 모아온 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론을 내려야 했다. 여기서 2년을 버틴다 한들 엔지니어 일자리는커녕 영어도 안 늘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계획을 바꿔 한달 정도 유럽여행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한인 슈퍼 일을 그만두고 영국생활을 정리하는데 한동안 뜸했던 헤드헌터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재규어 랜드로버에 일자리가 있는데 지원할 의사가 있는지 묻는다. 심장이 몹시 뛰었지만 꾹 참고 튜터와 연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 통화는 간단히 끝났다. 그에게 내 이력서를 제출하자 이주 정도 뒤에 다시 전화가 왔다. 서류통과 했으니 면접을 보라고... 당시에 녹음했던 통화내용을 들어보면 내 어눌한 영어를 듣고도 이력서를 내준 그 헤드헌터의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면접 날이 되었다. 영어튜터나 어학원 선생님 외에는 원어민이랑 이야기 해본 적도 없는데 면접이라니 그것도 재규어 랜드로버. 너무 긴장되고 무서워서 아침에 뜬 해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질문은 알아들을 수 있을까? 면접 장소는 찾아갈 수 있을까? 포기하고 가지 말까? 온갖 생각이 들었지만 한국에 돌아가 재규어 랜드로버에서 면접까지 봤다고 하면 불명예 귀향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용기 내어 면접장으로 향했다. 면접관은 두 명이 있었다. 역시나 영어가 문제다. 왼쪽 사람 영어는 알아 듣겠는데 오른쪽 사람 영어는 못 알아듣겠다. 반대로 오른쪽 사람은 내 영어를 이해하는데 왼쪽 사람은 내 영어를 못 알아 듣는 눈치다. 그러다 보니 서로 영어를 영어로 통역하는 웃픈 상황이 되었다. 인성 면접이 끝나고 기술(Techinical) 면접이 시작되었다. "이 제조방법은 표면이 매끄럽지 않다"를 설명 해야 하는데 매끄럽다라는 말을 못해 손가락을 테이블에 대고 문지르며 매끄러움을 표현하니, 저쪽에서 "smooth"라고 알려줬다. 또, 열처리과정이 필요하다라는 설명을 해야하는데 열처리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hearing?" 이라고 하니까 저쪽에서 "yes heat treatment" 라고 또 알려줬다. 머릿속이 온통 하얘졌고, 시간이 어떻게 지난 건지 기억이 희미했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면접을 보고 나서 ‘이건 돼도 문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 월요일 오전에 온 전화 한통, 기적이 일어났다. 합격이란다. <재규어 랜드로버 계약직에서 정규직이 되다> 워킹홀리데이를 시작하고 1년여가 지나서야 계약직으로 엔지니어 일을 시작했다. 한국 중견기업에서 일했던 내가 영국 대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출근 첫날, 한국 회사와는 다르게 귀나 코, 입술에 피어싱 한 아저씨들, 팀장은 상반신에 문신이 있어 셔츠에 문신 문양이 비치기도 하고, 머리를 허리길이까지 길러 묶고 다니는 아저씨들, 육십은 족히 넘었을 것같은 리셉션 할머니, 할아버지들. 한국에선 예상하기 힘든 직원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입사 일주일 뒤 처음으로 설계 연습과제를 받았다. 어림잡아 2-3일 정도 걸리는 일 같았는데 막상 시작하니 일주일이 걸렸다. 내 업무 속도가 느린 것 같아 걱정이 되어 Ovi라는 윗선임한테 고민이 된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듣더니 그 선임이 코웃음을 치면서 하는 말, 여기 있는 사람들은 2주가 넘게 걸리는 일이라고 한다. 이 설계 연습 과제와 한국에서 일한 경력을 인정해서인지 출근 한달 만에 정규직 제안을 받았다. 회사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취업비자로 전환한 사례가 없어 실수를 하는 바람에 취업비자 발급이 10달정도 걸렸지만 다행이 워킹 홀리데이 비자 종료 3일 전에 취업비자 할당 통보를 받았고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국에서 살며 내년이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5년이 지난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고 말도 안 되는 일 같은데 그 당시에는 스스로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매일 같이 스스로 재규어 랜드로버에 다니는 내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회사 출입증, 사무실, 업무 등, 꿈이 아니라는 것을 매일 확인했다. <산 넘어 산, 버티기> 한인 슈퍼에서 일 할 땐 엔지니어 일만 구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취업하고 나니 어김없이 아쉬운 점들이 생겨났다. 여전히 나의 고민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나 영어였다. 영어로 일을 해야 하는 회사생활이 부담되고 답답했다. 반년 정도 지나니 자신감과 자존감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회의가 있는 날은 회사 출근하는 것도 힘들었다. 오가는 이야기들을 이해하지 못하니, 상대가 질문을 해도 알아들은 척 이해하고 있거나, 협력사에게 답을 줘야하는 상황인데 내가 설명을 못하기 때문의 동료의 도움을 받아서 회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메일 쓰는 것도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기본적인 일에도 동료의 도움을 바라며 눈만 꿈뻑이는 내 모습이란… 또한 내 영어실력이 늘더라도 이 곳의 토론 문화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어려서부터 토론을 통해 학습한 이 친구들의 말빨은 내 한국어로도 게임이 안 될 것 같았다. 이 회사에서 쉽고 간단한 일들만 처리하고, 일을 배우며 경력을 개발할 기회는 안 올 것 같아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했다. 매일 기분에 따라 영국이 좋다가 포기하고 싶다가 하는 갈팡질팡한 마음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슴 속에 사직서를 품고사는 한국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마음한켠에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품고사는 영국 워홀러인 것을. 하루하루 버티고 도전하며 지내다 보니, 어느새 동네 커뮤니티 사람들과 교류도 시작하고 한류를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 한국음식을 대접하며 현지생활에 스며들게 되었다. 현재 나의 목표는 영국생활 10년을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꿈을 위해 영국을 찾는 수많은 한국 워홀러들에게 용기와 조언을 주고 싶다. 그렇게 영국에서 40살을 맞이하게 된다면, 처음 한국을 떠났던 나의 30살을 떠올려볼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다른 목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것이다. 오늘도 영국의 날씨는 포근하다. 남은 영국에서의 삶도 오늘 날씨처럼 포근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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